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 창세기 20장을 읽는다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중에서 누구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일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보이는 아비멜렉일까? 당연히 아비멜렉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기적으로 행동한 반면, 아비멜렉은 정직하고 솔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보다 훨씬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보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 20장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볼 때, 얼마나 신앙이 깊은지,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인지 보다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긍휼이 많은지를 본다. 얼마나 선교를 잘 하는가 보다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인격적이며 법을 잘 지키는지를 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창세기 20장을 읽을 때, 아브라함 보다 아비멜렉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창세기 20장을 읽을 때 알아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여전히 죄를 짓고 또한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성도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면, 노아가 술에 취해 실수한 이야기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것도,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부인한 것도 성경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기록된 이유가 성도에게 죄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다 받으시고 구원을 받았는데, 왜 또 죄를 짓는 것일까?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인격이나 도덕성이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고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귀었어도 이름이 바뀐 것이 옛 성품까지 바꾸지 못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옛 성품을 자동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은 잘 살던 헤브론을 떠나 그랄로 옮겨 간다. 헤브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 이 맘 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곳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헤브론을 떠나 그랄에 가서 머문 것일까?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결정은 평소 아브라함 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평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인다. 사라도 자신이 아브라함의 누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이야기를 통해 발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들어 있지만, 아브라함이 왜 자기 아내를 또 누이라고 속였는가 하는 것 보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아브라함 처럼 옛 잘못을 다시 반복해서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형제가 잘못을 하면, 그리스도인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보다, 먼저 정죄부터 한다. 물론 성도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은, 누구도 죄로 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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